[슈내/크로비]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주인님이 보고 싶다
난데없이 문을 때리는 소리에 집주인은 서랍에서 권총 한 자루를 꺼내들었다. 발소리를 죽이고 문 앞에 서자 또다시 집안을 울리는 소리는 어딘가 박자가 느리고 둔탁했다. 아주 조심스럽게 총구가 간신히 들어갈 만큼만 문을 열었지만 시야에 들어오는 건 하얀 눈이 쌓인 익숙한 폐차장이 전부였다. 문을 닫으려는 찰나 으음- 하고 앓는 소리가 발치에서 들렸다. 연이어 무언가 누르는 듯 문이 무거워졌다. 뒤통수가 눈에 들어왔다. 어깨에 눈이 내려앉은 크라울리가 보였다. 무릎을 꿇은 채 머리는 문에 처박은 모습에 깜짝 놀란 바비가 문을 활짝 열자 그는 당연하게도 앞으로 고꾸라졌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크라울리의 어깨에 내려앉은 눈이 마룻바닥에 흩어졌다. 남자의 두 손은 꽤 굵은 밧줄로 결박되어있었고 입에는 악마의 덫이 그려진 덕테이프로 꽉 막혀있었다.
바비는 당황한 나머지 멍청히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드물게 사고가 멈추는 경험을 한 바비는 두꺼운 손으로 제 이마를 퍽 치더니 서둘러 그를 끌어들이고 문을 닫았다. 세차게 불던 바람소리 대신 크라울리의 작은 신음소리가 집 안을 메꾸었다. 허겁지겁 입에 붙은 테이프를 떼어내자 그제서야 눈에 들어온 크라울리의 얼굴은 눈물범벅이었다.
“로버트….”
울음소리에 섞인 이름을 들으니 손이 벌벌 떨려왔다. 얼른 잭나이프를 가져와 밧줄을 끊어내자 시퍼렇게 피가 몰린 손이 보였다. 퉁퉁 부은 손은 차갑게 식어있었다. 바비는 그를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크라울리는 딱딱한 시멘트 바닥에서 꽤 오랫동안 무릎을 꿇고 있었는지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것 같았다. 축축 처지는 탓에 덜렁 안아들었다. 마침 벽난로 앞의 소파는 따끈하게 데워져있었다. 바비는 장작을 몇 개 더 집어넣었다.
한참을 엉엉 울던 크라울리의 옆에 앉아 둥근 어깨를 쓸어주던 바비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이상한 일이었다. 지옥의 왕이 요상한 꼴을 하고 나타나다니. 아랫동네에 큰일이라도 생겼나 싶어 마음이 급해졌다.
“얼른.”
재촉하는 소리에 크라울리는 고개를 더욱 파묻으며 웅얼거렸다. 아무것도 아니야. 문에 들이받은 이마가 까져 피가 맺힌 꼴을 보고 있으니 어이가 없었다. 정말로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고 생각한 바비는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고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불안한 마음에 결국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이 꼴로 나타나선 아무것도 아니라고!”
외침이 끝남과 동시에 딱- 하는 마찰음이 울렸고 크라울리를 덮고 있던 담요가 소파에 납작하게 가라앉았다. 허전한 손과 함께 심장이 덜컹 내려앉은 바비는 그를 강제로 불러낼까 생각했지만 실천에 옮기지는 않았다.
*
크라울리는 일주일이 지나도록 그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먼저 연락이 오길 바랐지만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바비 싱어였다. 사실 크라울리는 너무 쪽팔린 나머지 먼저 연락을 할 수가 없었다. 일부러 불쌍한 척, 그의 마음을 얻기 위해 그 모든 것을 꾸몄지만 온도가 많이 떨어진 밤에 차디찬 시멘트 바닥에 무릎을 꿇고 마냥 기다리니 체온이 떨어져 저도 모르게 잠들고 말았던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죽을 수도 있었지만 그는 악마였다. 저체온증 따윈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해서 졸음을 막을 순 없었지만.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한밤중이 되어있었고 한심한 제 행동이 몹시 후회됐지만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 고생을 하고 바비의 손에 이끌려 마침내 도착한 따뜻한 소파에서 있는대로 눈물, 콧물을 다 짜냈던 크라울리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콧대 높은 남자를 꺾을 수 있는 유일할지도 모를 기회였기 때문이다. 엄청 미안해하고 있을 그가 저를 부를 일이 있기만을 노리고 있었던게 약 한 달 쯤 되었을까. 마침내 강제로 바비 싱어의 거실 한복판에 드러누워 있을 수 있었다. 운이 좋게도 잔뜩 다친 모습으로.
왓더뻑! 딘이 소리쳤다. 크라울리는 미간을 찌푸린 채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비싸 보이는 옷은 여기저기 찢어져 있었고 그 사이로 붉은 피가 스며나오고 있는 모습에 윈체스터 형제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누구세요?”
“재미없거든.”
무심한 반응에 횡설수설하는 딘을 노려보며 한마디 툭 던졌다. 용건만 말해. 내 시간은 비싸거든. 힘겹게 일어나는 남자를 황망히 쳐다보던 윈체스터 중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좀 더 어린 쪽이었다. 꽤 바빴는지 최대한 빨리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위아래로 훑어보던 둘은 떨떠름한 얼굴로 밖으로 나가버렸고 남은 건 집주인과 악마 하나 뿐이었다.
“더 할 말이라도?”
크라울리는 그 둘이 떠나자마자 시야를 내려 저를 붙잡고 있는 덫만 쳐다보고 있었다. 작게 크라울리 하고 부르는 목소리에는 미안함이 가득 묻어있어서 고개를 더욱 숙이고 올라가는 입꼬리를 간신히 끌어내렸다. 지금 상황은 의도치 않았지만 신의 가호라도 따랐는지 늑대인간과 한 판 하던 도중 방심한 틈을 타 떼거지로 공격당하던 차였다.
“고개 좀 들어봐.”
큼지막한 두 손이 뺨을 부드럽게 감싸올렸다. 크라울리는 그의 손길에 사춘기가 온 10대 소녀처럼 기분이 순식간에 울적해졌다. 고개를 들어 다정한 눈빛을 마주하자 굳이 연기할 필요도 없었다.
“자기야, 나도 고통은 느낀다는 걸 알아줬으면 해.”
물론 금방 낫긴 하겠지만. 자조적인 말에 바비는 크라울리를 냅다 끌어안았다. 앓는 소리에 깜짝 놀라 힘은 풀었지만 여전히 크라울리는 그의 품에 안겨있었다. 크라울리는 자신의 애완견에게도 이 일은 떠들지 않으리라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