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군/정우민길]

개무 2017. 10. 19. 16:12

 

* 영화 천군 2005년 개봉작.

 

 

 

 

 

 맑은 공기와 함께 서늘한 바람이 둘 사이를 가로질러 빠져나갔다. 슬쩍 곁눈질을 해 훔쳐본 사내가 몸을 살짝 떠는 게 보였다. 그 몸짓이 단순한 추위 때문인지 조만간 닥칠 일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번에는 숨을 들이쉬는 것이 보였다.

 

 “비격진천뢰, 네가 가지고 가.”

 

 정우는 잠시 고민했다.

 

 “…같이 돌아가지 않겠다는 뜻이야?”

 “나한테 사살 명령 내려졌다는 거 다 알고 있어.”

 

 담담한 목소리였다. 그렇기에 박정우는 내심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자신의 잘못도 아니지만 그런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본인의 뜻이 그렇다면 막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비워진 잔에 막걸리를 다시 채워주자 단숨에 들이키는 남자는 좀 답답해 보였다. 그의 말대로 며칠 동안 사소한 의견 하나조차도 들어맞은 적이 없는 둘은 그 순간 조금이나마 적대감이 사라졌음을 느꼈다. 하지만 민길의 경계는 여전했고 그에 정우는 서운함마저 느꼈다. 그러나 그마저도 술이 계속 들어가니 속수무책이었다.

 

 “여기서 마실 수 있는 마지막 술일지도 몰라. 돌아갈 수 있다면 이 맛은 못 느끼디 않갔어?”

 “북에는 막걸리가 없는 건가?”

 

 노려보는 눈빛이 느껴져 무시하는 게 아니라며 황급히 변명하자 사내는 픽 하고 세는 웃음을 지었다. 그 입매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 민길은 제 목덜미를 쓸며 입을 열었다.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나?”

 “막연한 믿음이지…….”

 

 또다시 슬쩍 곁눈질을 했다. 순간 정우는 자기도 모르게 계속 상대의 눈치를 보고 있음을 깨닫고 작게 실소했다.

 

 “여기로 온 것만큼 우연적으로.”

 

 그 후 한동안 정적이 흘렀지만 어느 누구도 감히 고요를 깨부술 생각은 하지 못했다. 짙은 구름이 달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남아서 뭘 할 생각이야?”

 

 불쑥 물어온 질문에도 민길은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남자는 대답 대신 고개를 푹 숙였다. 정우는 구름이 거둬지며 다시 모습을 드러낸 달빛이 내려앉은 남자의 목덜미 안쪽을 훔쳐보았다. 흰 달빛에 의해 싸늘해 보였다. 이곳의 달은 유난히도 크게 느껴졌다.

 

 “그건 왜?”

 “아니, 그냥… 궁금해서….”

 

 대답하지 않을 것 같다는 정우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민길은 친히 입을 열어주었다.

 

 “뭐, 돌아가는 것보단 낫지 않갔어? 개죽음 당할 거 뻔한데 어느 머저리가 돌아가나.”

 

 정우는 이 아쉬움을 정의할 길이 없어 짜증이 다 났다.

 

 ‘이 자와의 헤어짐이 아쉬운가?’

 ‘같이 남지 못한 아쉬움?’

 ‘같이 남고 싶은 건가?’

 ‘무엇을 위해?’

 ‘왜?’

 

 수많은 질문들이 머릿속을 헤집었지만 마땅한 질문도, 명분도, 답도, 그 어느 것도 단정 지을 수 없었다. 민길도 나름대로의 고민이 많은지 말꼬리를 물어주지 않아 정우는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그저 달빛에 비친 남자의 모습만 넋 놓고 쳐다보았다.

 

 “어이, 박정우.”

 “어, 어?”

 

 낮은 목소리가 귓구멍을 파고들었다. 정신을 차리니 남자와 눈을 마주하고 있었다.

 

 “뭘 그렇게 쳐다봐?”

 “아, 미안 나도 모르게….”

 “뭐?”

 

 남자의 미간이 좀 더 찌푸려지는 걸 보니 이 남자에겐 차라리 솔직한 게 낫다는 걸 깨달았다.

 

 “아니- 이제 못 볼 거라고 생각하니까 아쉬운 것 같아서.”

 “아쉬울게 뭐가 있나. 골칫덩이 하나 없어져서 편하겠지.”

 “그게…" 정우는 말을 멈추었다. "아쉬운 게 아니라 아쉬운 것 같다고.”

 

 결국 입 밖으로 고민을 꺼내고 나니 차라리 속이 시원한 게 한결 나아졌다. 상대의 펴지지 않는 미간을 보기 전까진 그랬다.

 

 “무슨 말이야?”

 “사실 나도 잘 모르겠어. 헤어지는 게 아쉬운 건지, 같이 남지 못하는 게 아쉬운 건지… 모르겠어.”

 “생각보다 정이 많나 보군. 아쉬워할 것 없어. 고작 며칠 붙어있던 게 전부니까.”

 

 남자는 매정했다. 일부러 그러는 것 같기도 하고 원래 그런 성격 같기도 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정말로 같이 한 집에 머무르는 것만이 전부였다. 그것도 어쩔 수 없이. 그 외에는 모든 것을 각자 해결했다. 이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다.

 

 “그럼 좀 더 알아보는 게 어때.”

 “뭐하러?”

 

 정우는 민길이 어떻게라고 묻지 않는 걸 보고 크게 관심이 없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그냥… 이것만으론 아쉬우니까?”

 “됐어. 그러면 네가 더 고생할 것 같군.”

 "내가? 왜?”

 

 민길은 대답하는 대신 입꼬리만 올리며 웃었지만 정우는 그 모습이 보기 좋았다.





 앉은뱅이 술이라고도 불리는 막걸리는 명성 그대로였다. 조선시대의 전통 막걸리라는 걸 고려해 봤을 때 더하면 더 했지 덜하진 않을 것이다. 기우뚱하다 뒤로 넘어가는 민길을 붙잡아 안아들었다. 생각보다 가벼운 남자는 일어날 생각이 없는지 쥐 죽은 듯 자고 있었다. 낡은 초가집으로 돌아와 방에 뉘인 뒤 그는 자신이 아끼는 총을 민길의 옆에 조심스럽게 놔두었다. 남아 있을 사람에게 더 필요한 물건이다. 아쉬운 마음에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자 평소와 달리 풀어진 모습의 남자는 또 다르게 보였다. 얼마나 남았을지 모를 시간이 아까웠고 앞으로 만나지 못할 거라 생각하자 마음이 다급해졌다. 조심히 그의 옆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입을 부딪혔다. 술에 의해 온도는 따뜻했다. 흐트러진 옷 사이로 보인 붉은 상처는 느리게 아물고 있었다. 그 위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었다.

 

 

*

 

 

 넓은 들판에서 수많은 화살이 빠르게 날아와 민길의 몸뚱이를 뚫어냈다. 그러나 그는 굴하지 않았다. 마지막 삶의 발악이라도 하듯 당당하게 달려오는 기마병들과 맞섰다. 하지만 그의 의지와는 달리 육체는 강철이 아니었다. 두꺼운 칼날이 남자의 옆구리를 거칠게 베어냈고 붉은 피가 터진 둑 마냥 뿜어져 나왔다. 휘청이며 뒤로 밀려난 민길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니탕개의 모습을 노려보며 칼을 들었지만 무방비한 허리춤을 또 한 번 적에게 내어주었다. 그 무게를 이겨내지 못하고 민길은 내동댕이쳐졌다. 흔해빠진 나무 막대기가 되어버린 칼이 흙바닥에 꽂혀 위태롭게 흔들렸다.

 

 민길의 옆구리에서부터 세상 밖으로 자리를 넓혀가던 웅덩이는 눈앞을 가리는 흙먼지들과 함께 땅을 붉게 물들였다. 거무죽죽하게 물들어가는 짙은 회색의 군복을 보며 정우는 믿을 수 없었다. 민길에게 달려가며 다가오는 오랑캐들을 죽이고 빌어먹을 우두머리도 피떡이 되도록 내려쳤다. 니탕개의 얼굴을 거의 부수기 직전까지 후드려 팼지만 손에서 고통은 느낄 수 없었다. 서둘러 민길에게 다가가니 그는 덜덜 떨며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그의 길고 곧은 손가락이 거친 흙바닥을 세게 그러쥐었다. 살릴 수 없을 치명적인 부상이다. 정우는 그를 거의 끌어안다시피 하며 줄줄 새는 피를 막아보려 했지만 허사였다. 민길은 피로 칠갑을 한 손으로 정우의 옷깃을 붙잡아 당겼다. 남자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미적지근해지는 민길의 뺨을 떨리는 손으로 쓰다듬었다. 그와 닿는 첫 감각이었다.

 

 “…미안하다, 박정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