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쟁 중 볼드모트가 사라지고 난 바로 직후.
스네이프는 눈을 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체감은= 거의 반나절을 기절해있었던 것 같았다. 눈알을 굴려 주변을 훑었지만 움직일 수 없는 몸에 시야는 한계가 있었다. 누군가의 고통스러운 비명이나 고함 따윈 들리지 않았다. 어린 영웅을 찾아 울리는 그 소름 끼치는 목소리도 마찬가지였다. 그자는 위대한 노인의 말대로 죽었거나, 한 조각의 영혼도 남지 않은 채… 소멸했을 것이다. 눈 앞에 펼쳐진 검게 일렁이는 파문에서 느껴지는 스산함은 평화롭기까지 했다. 그는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전쟁이 막을 내렸다고 확신했다. 그렇다고 불만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어찌 됐든 모든 것의 끝이 오면 미련 없이 떠나고 싶었는데, 그런 자유마저도 누릴 수 없게 된 현실에 참담함을 느꼈다. 게다가 이렇게 목숨을 부지한 채 딱딱한 돌바닥 위에 멍청하게 널브러져 있다간 누군가에게 들켜 곧장 아즈카반에 넣어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제는 보호해 줄 사람도 남아있지 않았다. …제 손으로 죽여버렸으니까.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간신히 정신을 붙잡고 있는 수준에 불과했다. 순간이동이라도 했다간 아무리 이중스파이를 했던 사람이라도 몸이 분리되는 불상사는 피할 수 없을 게 뻔했다. 그렇게 될 바에야 차라리 이렇게 서서히 죽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죽음으로 안식을 찾을 수 있다면 그깟 아즈카반 따위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스네이프는 쓸데없이 주둥이를 나불거린 죗값을 이렇게 치러야 한다면 응당 그럴 생각이었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때에는 릴리의 눈도 볼 수 있었으니 더할 나위 없었다. 다시 한 번 볼 수 있다면 생에 최고의 순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테지만, 그건 주제넘는 바람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 먼 곳까지 누군가가 올 생각은 없어 보였고 이미 해리 포터도 그자와 함께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울적해졌다. 결국 모든 게 노망난 노인네의 뜻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여러모로 대단한 늙은이라 생각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마비됐던 몸이 풀리는 것인지 서서히 고통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제야 알아차린 사실은 거칠게 뜯긴 목구멍에서 끊임없이 피가 흘러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과다출혈로 죽어도 진즉 죽었어야 할 미련한 몸뚱이는 무엇이 아쉬워서 조금이라도 더 살아남으려 발악하는지 도대체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해리 포터든 릴리든 간에 당장 죽고 싶을 만큼 지독한 고통이었다.
역시 평화롭게 죽는 건 사치였던 것일까. 몸은 점점 사시나무 마냥 주체할 수 없이 떨렸지만 그 와중에도 스네이프는 안간힘을 써서 지팡이를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삐걱대는 몸뚱이는 뭔가 찾을 생각이 없는지 의지와는 다르게 움찔대기만 할 뿐 그대로였다. 고통에 얼굴이 일그러지며 눈물이 절로 비져 나왔다. 이게 바로 진정한 배신자의 말로라고 생각했다. 죽기를 마냥 기다리는 것 외에든 별다른 방법이 없다. 주변에 있을 법한 지팡이도 찾을 수 없었다.
달빛이 창문 틈새로 비쳐들어왔다. 눈이 부셨다. 문득 말포이 저택에서 본 루시우스의 하얗게 질린 얼굴이 떠올랐다. 말포이 가문은 어떻게 됐을까. 살아남았을까. 분명히 그럴 것이다. 나시사와 깰 수 없는 맹세를 하고도 숨을 쉬고 있으니 틀림없다. 드레이코는 스네이프의 인생에서 유일하게 지켜낸 목숨이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스네이프는 자신이 약속을 지키는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는 걸 이제서야 발견했다.
결국 지팡이 찾기를 포기하고 이런저런 쓸데없는 잡생각을 하니 점점 졸려왔다. 드디어 죽는다고 생각이 들자 뜬금없게도 자신의 패트로누스가 떠올랐다. 어차피 살아있는 건 마지막이었다. 고통쯤은 견뎌보기로 했다. 앞으론 이런 고통조차 느끼지 못할 존재가 될 테니. 초록 눈 대신 암사슴이라도 보고 싶었다. 이제는 릴리에 대한 감정이 사랑인지 미련인지 원망인지 후회인지도 모를 먼지 낀 추억거리 정도의 감정만 남아 있었다. 고작 추억거리라니…. 사실 그것조차도 아무것도 아닐지 모른다. 아까와는 달리 의외로 금방 손에 들어온 지팡이에 짜증이 치밀어 올랐지만 놓칠세라 꽉 쥐고 입을 열었다.
“컥-!”
주문 대신 목구멍에서 피가 넘어오는 소리가 울렸다. 스네이프는 자신의 목이 뚫려있단 사실이 생각났다. 욕지거리가 튀어나왔지만 욕 대신 얼마 남지 않았을 피만 꿀렁꿀렁 흘러나올 뿐이었다. 정말이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모든 학생을 벌벌 떨게 만들던 그 대단하신 ‘세베루스 스네이프’가 이런 꼴이라니…….
스네이프는 결국 말하기를 포기하고 마음속으로 쉴 새 없이 되뇌기 시작했다. 무언 주문으로 패트로누스를 불러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네이프는 마침내 지팡이 끝에서 희미하게 안개가 나와 암사슴 형태를 이루는 것을 지켜볼 수 있었다. 이건 전세계 마법사 최초의 전무후무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잠시, 따뜻한 기운은 점점 차가워지는 스네이프의 몸을 데우기로 작정한 것처럼 다리 위에 딱 붙어 엎드렸다.
스네이프는 역시 마음씨 착한 릴리는 그들의 이름을 팔아넘겨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고 그것도 모자라 세상을 구한답시고 그들의 아들을 도살장의 돼지라도 되는 것마냥 키우다 죽게 만든 배신자에게도 마지막까지 아량을 베푼다고 생각했다. 점점 눈이 감기며 암사슴도 희미해져 가는 게 보였다.
…이제 끝이다.
*
“교수님!!”
스네이프는 눈을 번쩍 떴다. 의심할 필요도 없이 짜증 나는 그 목소리였다. 잊을 수가 없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살아남은 소년’ 해리 포터의 목소리였다. 초록색 눈동자를 넋 놓고 쳐다보았다. 두 번째 생의 마지막과 시작을 해리 포터와 함께하는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서로 죽어서 만난 걸지도 모른다는 추측과 함께 문득 넘겨줬던 기억이 떠올라 부끄러워져 녹색 시선을 피해 천장만 쳐다보았다. 하얀 천장이 눈부셨다. 이상하게도 뭔가 병동에 누워있는 느낌이었다. 눈을 돌려 주변을 보아도 성 뭉고의 병동과 쏙 빼닮은 꼴을 하고 있었다.
“여긴 성 뭉고 병원이에요.”
얼마나 시간이 흘렀길래 이젠 레질리먼시라도 쓰는 걸까? 내가 살아남았다고? 도대체 어떻게? 그럼 어둠의 마왕은? 점점 늘어만 가는 궁금증이 머릿속을 꽉 채웠다. 빌어먹을 어둠의 마왕. 죽지 않고 그저 육체만 사라진거라면 그 지긋지긋 한 전쟁이 또다시 발발하지 않으리란 법은 없었다. 스네이프가 눈을 피해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는 꼴을 보던 해리는 그의 속마음이라도 읽은 건지 주절대기 시작했다.
“볼드모트는 죽었어요. 어떻게 제가 살았냐고요…?” 얼마간의 침묵이 흘렀다. “……저도 몰라요. 분명히 전 주문을 맞았거든요…….”
중간중간 생각이라도 하는지 문장 사이사이의 침묵은 꽤 길었다. 해리의 말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듣는 이의 반응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아마 제 안에 있던 볼드모트의 영혼이 사라졌나 봐요. 파셀통그도 같이 사라졌거든요…….”
해리가 볼드모트라고 말할 때마다 움찔거리는 스네이프였다. 그러나 위대한 영웅은 이것도 신경 쓰지 않기로 한 것 같았다. 스네이프의 눈이 자연스레 상대의 이마로 옮겨졌다. 눈치를 보던 해리는 또다시 입을 열었다.
“여전히 흉터는 남아있지만 이제는 화끈거리지 않아요.” 눈알을 돌리던 해리는 말을 이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 같아요.”
이제는 단지 평범한 흉터로 남아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고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자신은 살아남았고, 청춘을 다 바친 전쟁도 끝이 났다. 왼쪽 팔뚝이 보고 싶었다. 징그러운 문신도 사라졌을까? 스네이프는 직접 확인해보고 싶었지만 미동조차 하지 않는 팔 덕분에 확인은 불가능했다. 그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겠거니 생각할 뿐이었다. 여전히 남아서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증명하고 있을 것이다. 족쇄가 되어 앞으로도 영원히.
“그리고 교수님은……, 제가 말했어요. 이중 첩자였다고. 물론 몇 가지는 말하지 않았어요. 그건……. 프라이버시라고 생각했거든요.”
이 말을 하는 해리는 조금 부끄러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결국 포터가 쓸데없는 짓을 저질렀군.’
“저, 교수님?”
이제는 청년이 된 아이의 부름에 천장에서 눈길을 돌려 쳐다보았다. 터널같이 검은 눈에 빨려들어가기라도 하듯 허리가 숙여지던 해리는 순간 징계라도 받고 있다고 잠시 착각이라도 한 건지 머뭇거렸다. 스네이프는 웃기게도 해리가 여전히 부끄러워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사합니다. 어, 그러니까… 모두 다요. 지금까지 지켜주시고…….”
주절대는 말을 뒤로하고 스네이프는 그냥 눈을 감았다. 그런 말을 듣고자 한 일이 아니었다. 해리 포터를 위해 한 일이 아니었다. 그녀를 위해 행동했다. 아니, 순전히 세베루스 스네이프 자신을 위해서였다. 사죄든 죄책감을 덜기 위함이든. 스네이프는 끝까지 이기적인 남자였다. 한참 동안 은혜를 갚는답시고 입을 여는 지겨운 포터 녀석의 얼굴이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해리 포터는 그런 것까지 신경 쓸 눈치라는 게 없는 아이였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으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그 간단하기만 했던 꺼지라는 말조차도 할 수가 없는 꼴이 한심했다. 이생에서 무슨 할 일이 더 있다고 살아남은 건지…. 이젠 살아남은 소년 대신 살아남은 배신자나 살아남은 전 마법약 교수, 살아남은 죽음을 먹는 자 등 각종 살아남은 것과 관련된 모든 타이틀이 붙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미련하게 살아남는 건 운이 나쁘다고 생각했다. 편히 쉬고 싶었다. 지금 꼴을 보면 그러기 위해선 자살이라도 해야 할 판이다.
스네이프는 꽤 쉬울 거라 생각했다. 지금 당장 밖에 가만히 누워 있기만 해도 남아있는 죽음을 먹는 자들이 쏘아댄 주문이 날아올 게 뻔했기 때문이다. 배신자를 멀쩡히 돌아다니게 하는 건 그들의 취미와는 거리가 멀다는 걸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아주 잘 알고 있었다.
*
스네이프의 엄청난 노력 끝에 기적적으로 약 이 년의 세월이 지나자 간신히 일상생활이 가능해졌고, 그는 곧바로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동안 거의 매일같이 출석 도장을 찍듯 병실 문을 열어재끼며 착한 영웅 행세를 하는 포터도 이젠 끝이라고 생각하니 조금 아쉽기도 하지만 큰 짐을 덜어낸 시원섭섭한 기분이 들었다. 모든 건 시간이 약이라고 했던가. 이렇게 홀가분한 느낌은 정말 몇 년 만인지 모를 정도로 스네이프는 답답한 삶을 살았었다. 그러나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여전히 운이 나쁜 스네이프는 병동 문을 나서자마자 빌어먹을 포터와 맞닥뜨리고 말았다. 그러나 스네이프는 이제 사소한 것에 개의치 않기도 했다. 아니, 그러려고 했지만 영운은 그렇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게 병실을 나서려는 그를 붙잡았다.
“어디 가세요? 아직 움직이기엔 상태가 나빠요.”
‘좋지 않아요’도 아니고 ‘나빠요’라니. 물론 그렇겠지. 이놈의 해리 포터는 착한 영웅 놀이가 질리지도 않는지 아주 평생 해먹을 생각인 것 같았다. 스네이프는 붙잡힌 팔을 파리 쫓아내듯 떨쳐냈지만 곧장 다시 잡히고 말았다.
“교수ㄴ…….”
“교수님이라 부르지 마라. 난 이제 네 교수가 아니야. 너와 나는 이제 아무런 관계가 없어. 내 임무는 끝났다. 널 위해서 한 것도 아니니 이런 식으로 신경 써 줄 필요 없다.”
라고 생각했다. 저렇게 긴말은 아직 불가능했다. 스네이프는 답답한 마음에 편지 한 통을 내던지든 건넸다. 아주 얇은 두께였다. 온전한 한 장이라도 들어있을까 싶을 정도로 얇았다. 그런데 민망하게도 해리는 스네이프를 붙잡은 채 읽기 시작했다. 편지가 아니라 메모라고 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그것을 읽는 데엔 그렇게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매정하다.’
하지만 해리는 수년 동안 그 긴 시간 동안 남을 의심하고 경계하는데 써버린 남자가 고맙고 불쌍했다. 이건 동정일지도 모른다. 물론 스네이프가 알면 당장 어떻게 되어도 이상하지 않기에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지만-여전히 몸 상태가 나쁘지만 해리에게 그는 아직 호그와트의 몇 안 되는 교수 중 그 악명 높은 ‘마법 약 교수 스네이프’였다-문득 왠지 그도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당연했다. 이 세계에서 누구보다 용감하고 똑똑한 남자가 한낱 애송이의 생각 따위 모를 리 없었다.
“어쨌든 절 구해주셨잖아요. 그걸로도 충분해요.”
“이봐 포-”
해리는 감히 전 스승의 말을 잘랐다.
“전 앞으로도 계속 교수님이 제게 해주셨던 것보다 더 노력할 거예요.”
스네이프는 경악에 가득 찬 표정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드디어 미친 거냐?”
전직 교수는 고운 말을 쓰지 않기로 작정한 것 같았다. 해리는 웃기게도 이 상황이 마음에 드는 중이었다. 한껏 쉬어버린 목소리지만, 그래도 좋았다. 언제부터 이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매력적이었다.
지금에야 드는 생각이지만 그의 목소리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어떤 마력이 깃든 것 같았다. 남들이 들으면 미쳤다고 생각하겠지만 적어도 해리에게는 그랬다. 물론 완벽히 돌아오려면 한참 멀었지만.
“신종 고문을 만들어낸 걸 축하해주지.”
해리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런 해리를 보는 스네이프는 여전히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언제라도 기회가 되면 사라질 생각을 하는지 해리는 알지 못했다.
*
“배신자!!”
스네이프는 초록 불빛이 곧장 자신에게 다가오는 걸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급히 옆에서 잡아당긴 덕분에 또다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죽음을 먹는 자는 곧바로 붙잡혀 아즈카반에 수감되었다. 하지만 스네이프는 아즈카반에 죄수가 한 명 더 늘어난 것이든, 살인 주문이 날아온 것이든, 죽음을 먹는 자를 만난 것이든, 별 감흥이 없어 보였다. 사실 모든 것에 별 감흥이 없어보이는 스네이프를 사무실에 집어넣었다.
“뭡니까?”
“뭘 말이냐?”
“왜 그랬냐고요!” 해리의 얼굴이 상상도 하기 싫다는 듯 일그러졌다. “제가 조금이라도 늦었으면 죽었을 거예요!”
“그런데?”
순간 공기가 멈추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해리는 표정이 점점 심각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뭐라고요!!”
해리는 완전히 화가 난 표정으로 스네이프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포터, 난-”
스네이프 답지 않게 한숨을 쉬었다. 해리의 살짝 표정이 누그러졌지만 여전히 좁아진 미간은 펴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스네이프는 그 얼굴을 바라보며 지금 누구 앞에서 주름잡는 거냐는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다.
“포터, 더는….” 스네이프는 이 단어를 꼭 써야 하는지 잠시 고민했다. “…날 위해 뭘 하지 않아도 된다. 이젠 됐다. 난….”
스네이프는 별안간 숨 막히게 끌어안는 건장한 청년 덕에 굳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식의 신체 접촉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전이었다.
“교수님, 제발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 해리는 크게 숨을 한 번 들이쉬었다 내뱉으며 말했다. “전 당신이 필요하다고요. 곁에 있어 줘요.”
스네이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어서 그저 멍하니 서 있자 슬그머니 떨어져 나오는 해리였다. 본인도 민망한지 벌게진 얼굴을 하고 머뭇거렸다. 스네이프에겐 이 모든 게 다 부질없을 뿐이었다.
“어, 음…. 차 드실래요?”
부끄러워하는 해리에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
그날 이후, 해리는 은근히 스네이프를 …만지기 시작했다. 다른 단어를 붙일 수 없는 정도로 분명했고 우연이 아닌 의도적인 손길이었다. 손을 살짝 잡거나 어깨를 살짝 건드리거나 하는 등 사소한 행동들이었지만, 스네이프가 생각하기에 해리 포터와 자신의 사이에선 전혀 그럴 수가 없는 짓들이었다. 그는 결국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포터, 하나만 묻자.”
“네! 뭐든지요!”
거의 처음으로 스네이프가 먼저 말을 걸어오자 해리는 눈을 밝히며 스네이프를 보았다.
“왜 그러는 거냐?”
“네?” 여전히 해리는 싱글벙글 웃는 표정이었다.
“왜 자꾸 …날 건드리냐고.”
“……네?” 그제야 해리는 진심으로 고민하는 얼굴을 내비췄다.
“자꾸 날 건드리고 있잖아.” 스네이프는 제 입에서 이런 단어가 나오리라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신체적으로 말이다.”
도리어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는 해리였다. 스네이프는 순간 혹시 혼자 너무 깊게 생각한 건가 싶어 민망해지려던 찰나, 앞에 있는 남자의 입에서 나온 말에 민망한 감정은 쏙 사그라졌고 황당함만이 남았다.
“저 받아주신 거 아니었어요?”
“뭐?”
“네?”
스네이프는 이해할 수 없었다. 서로 당황해 어색한 기운이 둘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네가 뭘 했는데?”
“고백했잖아요!”
“뭐라고? 언제?” 스네이프는 억지웃음을 지었다. “아, 포터 혹시 그때 내가 잠을 자고 있진 않았나? 아니면 혼자 꿈이라도 꾸고 착각을 하나 본데.”
“아니에요!” 해리는 강력히 부인했다. “떠나지 말아 달라고, 곁에 있어 달라고 했는데…….”
해리는 말을 멈추었다. 사실 본인도 민망하기는 한지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가, 가만히… 있으셨잖아요…….” 해리가 거의 속삭이듯 말했다.
“그게 어딜 봐서 허락한 거냐? 애초에 고백인지도 몰랐다.”
“그럼 그게 뭐겠어요?”
도리어 어이없어하는 해리의 표정을 본 스네이프는 비웃듯 미소를 지었다.
“늘 하던 정신 나간 짓이라고 생각했지. 넌 학창 시절에도 항상 그러지 않았니.”
“그렇진 않아요. 그럼 그렇게 있으세요.” 해리는 씩 하고 웃었다. “지금 당장은 그게 더 좋을 것 같군요.”
해리는 다짜고짜 스네이프에게 다가가 마른 턱을 양 손으로 감싸쥐었고 그대로 입맞춤을 했다. 스네이프는 당황한 나머지 멍청하게 서 있었고, 그건 해리에게 좋은 기회였다. 단순히 맞닿아만 있던 두 입술이 쪽 소리가 나며 서로의 입에서 떨어졌다. 해리의 손이 거친 흉터가 자리한 목덜미 부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스네이프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교수님……?"
스네이프가 말없이 나가버리고 황급히 해리가 따라 나갔지만 그는 이미 순간이동을 한 뒤였다.
*
스네이프는 망연자실한 채로 스피너즈 엔드에 도착했다. 해리 포터와 키스라니. 도대체 언제 포터 혼자 감정을 가지고 있던 건지 소름이 다 끼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더 무서운 것은 해리 포터를 끔찍이 생각하는 추종자들이었다. 어찌나 극성인지 각종 팬레터들이 매일같이 날아와 편지 무덤을 이루어 여기저기 피해를 주었기 때문에 지금 당장 납치를 당해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스네이프는 키스를 하는 순간에도 ‘이제는 떠날 수 있다’라는 생각이 떠올라 여기로 이동한 것이다. 특히 이 주변엔 굳이 찾으러 다니지 않아도 남아있는 죽음을 먹는 자들이 득실거릴 게 뻔했기에 생의 마지막은 조금이라도 편한 ‘내 집’이라고 할 수 있는 곳에서 맞이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물론 스네이프에게 남은 ‘편안한 곳’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굳이 사람들 많은 곳에서 요란하게 죽고 싶진 않았다. 최근 스네이프가 살아있다는 소식이 퍼져 이를 갈던 죽음을 먹는 자들과 자주 마주친 탓에 해리도 덩달아 위험해지던 차였다. 스네이프에게 가지는 관심만큼 해리에 대한 그들의 관심도 높지만 굳이 그것이 두 배가 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애써 지켜낸 목숨이 어처구니없게 구질구질한 목숨하나 살리자고 허망하게 날릴 순 없는 노릇이 아닌가. 스네이프에게 해리의 키스는 평생 당황스러운 일일 테지만 그에게 지금까지의 수고를 갚아 준 셈 치기로 타협했다.
거의 다 쓰러져 폐허나 다름없는 꼴인 집을 보니 마치 자신의 처지와 같아 보여 안타깝기도 하고 이래도 싸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어 갈피 잡지 못할 기분을 느꼈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가자 곰팡내가 훅하고 끼쳐왔다. 눅눅한 공기가 몸을 감싸며 스산한 기운이 발을 타고 올라왔다. 간만에 몇 년 전으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이런 곳이 자신의 마지막과 어울리는 곳이라 생각하며 자주 머물렀던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걸을 때마다 끽끽대는 잡음이 들려왔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곧장 누군가에 의해 밀쳐지며 문이 닫혔다. 쾅! 하고 닫히는 진동에 천장에서 먼지가 떨어졌다.
“빌어먹을 배신자! 제 발로 여길 들어오다니, 지능이라도 떨어졌나? 역시 기다리고 있길 잘했군!” 비쩍 마른 남자가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 맥켄지.”
과거 죽음을 먹는 자의 무리에 있던 별 볼 일 없던 자였다.
“자네가 웬일로 머리를 굴렸나? 의외로 끈기가 있나 보군.”
스네이프의 말을 듣고 있는 맥켄지의 눈은 제정신이 아닌듯 미친듯이 번뜩이고 있었다. 쉽게 죽여줄 것 같지는 않았다.
“난 네가 배신자라는 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 언젠간 드러날 줄 알았어! 주인님께 그렇게 말했지만 내 말을 믿어주지 않으셨지…….” 맥켄지가 나불거렸다.
“이젠 없는 주인님을 아직도 들먹이고 있는 걸 보면 주인님이 참 좋아하시겠군. 안 그런가?”
스네이프의 말에 맥켄지의 주둥이가 호선을 그렸지만 미친 눈빛만큼 정신도 미친 건지 이상하게 희망에 가득 차 보였다.
“그렇지…. 이제 주인님은 없지…. 하지만 곧 돌아오실거야. 안 그런가?” 대답을 바라는 것 같지 않았다. “크루시오!!!”
“흐아아악!!!”
고통에 멀어져 있던 몸이 극심한 고통을 느끼자 입에선 비명이 절로 튀어나왔다. 온몸의 관절 마디마디가 다 멍이 드는 것 같았다. 결국 입 밖으로 피를 토해냈다.
“허억-”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스네이프를 의미심장하게 쳐다보다 무어라 말하려 하던 그때, 어디선가 무장해제 주문이 튀어나왔다.
해리 포터였다.
순식간에 포박당한 잔당은 쉴 새 없이 입을 놀렸다. 해리는 품에서 꺼낸 큼지막한 동전에 어떤 행동을 하더니 널브러져 있는 스네이프를 잡고 곧장 순간이동을 했다. 스네이프는 울컥하고 올라오는 피를 뱉어냈다. 누워있던 스네이프의 얼굴에 거무죽죽한 피들이 다 튀어버렸다. 정신은 혼미했고 몸도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화난 포터의 눈이 보였다. 아직도 저 초록색 눈이 화가 나 쳐다볼 때면 오래전 일들이 생각났었다. 그런데 지금은 까마득히 먼 옛날, 과연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 싶을 정도로 멀게만 느껴졌다. 이제는 화난 눈도 멍청한 눈도 스네이프에겐 그냥 다 어색하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포터….”
목구멍에서 꿀렁이며 피가 흘러나왔다. 마치 보트하우스에서 마지막이라 생각했던 전쟁의 종말이 눈앞에 아른거려 목구멍이 시큰거리는 착각마저 들었다.
“제발-”
덤블도어가 죽던 날 밤이 생각나는 순간이다. 유언이라고도 할 수 있는-
“세베루스. 제발, 제발 그러지 마세요.”
스네이프는 저 얼굴로 저 입으로 저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들으리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다. 하루 안에 다양한 방법으로 당황하게 하는 게 여긴 대단한 능력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함께한 시간 때문일까. 이제는 그 맑은 초록색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히는 걸 보니 조금 미안하기까지 했다. 그것도 마법 세계를 구한 영웅이 한낱 마법사 때문에 흘리는 눈물이라니…. 무릎이라도 꿇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차마 입 밖으로 미안하다는 말은 감히 뱉을 수 없었다.
‘…저런 눈을 본 게 얼마 만이지?’
무언가 심장이 찌릿했다. 스네이프는 이제 심장병이라도 생긴 것 같아 자신의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덜덜 떨리는 몸으로 피를 질질 뱉어내며 해리의 눈만 쳐다보고 있는 스네이프를 보던 해리는 말 대신 움직이기 시작했다. 곧 응급 처치가 끝나자 한결 편안해 보이는 스네이프를 마주 보았다.
“제가 어떻게 하면 그만두실 거예요?”
“무엇을?” 스네이프는 망설이지 않았다. “살아남는 것 말이냐?”
“…그 말이 아니잖아요.” 이 말을 하는 해리는 처음으로 조금 지쳐 보였다.
갑자기 그 붉은 머리를 한 소녀가 떠올랐다. 스네이프는 이런 질문까지 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물어보고 싶었다. 아무렴 어떤가 싶었다. 해리 포터와 오래 지내다 보니 덩달아 제정신이 아닌가 보지.
“포터, 나랑 만나는 걸로 시간을 축내는 것 말고는 할 짓이 없는 건가?”
갑작스러운 질문에 해리는 조금 당황했다. 네? 하고 멍청하게 되물어보자 해리는 놀랍게도 민망해하는 스네이프를 볼 수 있었다.
“그… 위즐리 가에… 여자애 말이다.”
“아, 지니요.”
해리는 그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스네이프는 역시 괜한 걸 물어봤다며 자책하는 도중 슬며시 해리의 다부진 손에 붙잡혀있던 왼손이 들렸다. 해리는 그 손을 조심스럽게 고쳐 잡고 손바닥에 한 번, 손등에 한 번 키스했다. 스네이프는 그런 해리를 떨치지 못하고 그저 바라만 보았다. 해리의 입술은 스네이프의 손을 점점 타고 올라와 키스했다. 굳게 잠겨있던 단추를 끌러 손목을 지나 어둠의 문신이 있는 곳까지 다가왔다. 살짝 긴장한 스네이프와 달리 해리는 전혀 망설이지 않고 그 징그러운 문신 위에 입술을 꾹 누르는 모습에 스네이프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초록빛과 마주쳤다.
예전과는 다르게 그 눈빛에서 느껴지는 세월의 흔적에 이상한 동질감을 느꼈다. 전쟁을 겪고 난 아이의 눈빛은 더 이상 이전에 알던 것이 아니었다. 스네이프는 무언가 가슴이 벅찬, 감당하기 버겁기까지 한 감정이 들었다. 하지만 그 감정이 무엇인지 채 느끼기도 전에, 녹색 빛이 가까이 다가와 코앞에서 멈추었다. 서로의 코가 부딪혔다. 스네이프는 짧게 숨을 들이켰다. 젊은 청년 특유의 당당함이 마른 코를 타고 올라왔다. 해리는 그대로 스네이프에게 입을 맞추었다. 거칠지만 부드러운 손길로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는 해리를 보던 스네이프는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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